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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동굴 세계의 문화로! About Gwangmyeong Cave

category 여행 2017. 6. 12. 07:15


1912년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광명동굴(구.시흥광산)은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이자 해방 후 근대화ㆍ산업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업유산이다. 1972년 폐광된 후 40여 년간 새우젓 창고로 쓰이며 잠들어 있던 광명동굴을 2011년 광명시가 매입하여 역사ㆍ문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 광명동굴은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결합된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간 14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가 놀란 폐광의 기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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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창조공간
동굴이라는 공간적 차별성과 희귀성은 문화예술 콘텐츠와 결합되어 새로운 창조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동굴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동굴 곳곳은 수많은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한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어둠을 배경으로 한 빛과 뉴미디어는 상상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산업현장으로만 여겨지던 갱도는 와인동굴로 변신해 소통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어 새로운 컬쳐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고 있다. 폐광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생시킴으로써 국내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창조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광명동굴은 2015년 유료화 개장 이후 불과 10개월 만에 관광객 100만 명이 넘어서고, 수입 40억 원, 일자리 200여 개를 창출하고, 도시와 농촌의 상생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대한민국 창조경제의 모델로 우뚝 섰습니다. 2016년에는 「프랑스 라스코동굴벽화 국제순회광명동굴전」,「판타지 전문영화제」등 국제적 문화행사와 새로운 볼거리로, 2016년에는 관광객 142만명, 시 수입 85억원, 일자리 415개를 창출했습니다.



황금의 땅, 광명동굴
동굴에는 아직 많은 양의 황금이 남아 있어 엘도라도(황금을 찾아서)의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귀영화의 상징이자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황금의 다양한 진면목을 이제 광명동굴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



광명동굴의 최초의 기록은 1903년 5월 2일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광업권침탈차원에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압박하며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고 금ㆍ은광산을 발견해서 이를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광명동굴 역시 1912년 이이다 큐이치로라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광산 설립이 되었고 '광상조사기관'을 앞세운 일제의 광업권 침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산에는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징용과 생계를 위해 온 광부들이 많았으며 전성기 때에는 5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채굴된 광물들은 일본으로 보내져 대동아 전쟁의 무기가 되었고 해방 전까지 엄청난 양의 광물이 수탈되었다.

세계문화 유산의 가치
근대산업유산으로서의 보전과 활용
광명동굴은 10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광산역사와 함께 상부레벨로부터 지하7레벨까지 7.8km의 갱도와 외부에 광석을 선별하던 선광장터가 현재까지 그대로 남겨져 있다. 선광장은 한 덩이 한 덩이를 쌓아 올린 석조 플랜트와 숨 가쁘게 움직였을 기계를 받쳐주던 콘크리트 기초들이 남겨져 있어 당시 산업건축양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시설일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로서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학술자료의 주요한 시설이다
또한, 선광장 터와 더불어 광명동굴 내 지하갱도는 갱도구조를 통해 광산개발의 방식과 통풍, 환기 등 지하갱도에서의 작업환경을 알 수 있는 살아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산업역사현장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폐광 후 40여 년의 시간만큼 먼지 쌓인 광부들의 낙서 이것이야 말로 역사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현장이었던 시간과 함께 근대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역사의 순간까지 광명동굴은 105년 의 긴 시간 동안 숫한 역사를 써 내려간 유형의 자산과 무형의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 이제 근대산업유산으로서의 보전과 문화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을 위한 활용을 통해 성공적인 도시재생의 사례로 남고자 한다.









광명동굴은 1903년 5월 2일 시흥군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설립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광업권 침탈 차원에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압박하며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고 금·은 광산을 발견해서 이를 독점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광명동굴(구 시흥광산) 역시 1912년 이이다 큐이치로라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다시 광산 설립이 되었고 ‘광상조사기관’을 앞세운 일제의 광업권 침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광산에는 대부분 농민 출신으로 징용과 생계를 위해 온 광부들이 많았으며 전성기 때에는 5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하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채굴된 광물들은 일본으로 보내져 태평양 전쟁의 무기가 됐고 해방 전까지 엄청난 양의 광물이 수탈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 광명동굴은 자료 소실로 인해 몇 점 안되는 잔존 유물과 생존광부의 증언에 의해 광산 역사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과거 역시 광명동굴의 역사적 흔적이며, 해방 후 산업경제발전에도 기여한 광산 산업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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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myeong Cave (formerly named as Siheung Mine) which was shut down in 1972 is a place where people were drafted to work by force and abus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trace of modern industrialization still remains. It was abandoned for 40 years, from 1972 to 2011, with the strong smell of salted shrimps. In 2011, after being purchased by Gwangmyeong City, it has been transformed into a place where people can relax and enjoy cultural and art experiences. It is considered the best cave theme park in Korea with combination of industrial heritage and cultural value, and accomplished the miracle of an abandoned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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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myeong Cave was first established as the 「Siheung Mine」 in Gahak-ri, Siheung-gun on May 2nd, 1903. During the early years of Japanese Colonial Rul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pressured King Gojong to invest heavily mining industry and established 'Deposits Investigation Agency' to find and monopolize the gold and silver mines. Gwangmyeong Cave (formerly named as Siheung Mine) was established again under the name of a Japanese, Iida Kyuichiro, in 1912 and it is seemed that this is related to concerted efforts by Japan to mine extensively. At that time, most of the miners were peasants who either worked for a living or were forced to do so by force. In its heyday, there were 500 miners working at the mine. Minerals mined after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were sent to Japan and used to make weapons for the Pacific War and a great amount of minerals was plundered before the liberation. 100 years later, with all of the minerals extracted all that is left is to examine the mine's history, the statements of the miners that have survived and the few relics that remain. The painful history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is also reflected in the history of the Gwangmyeong Cave. It also has value as an industrial heritage landmark for the mining industry which has contributed to both the industrial and economic development of Korea in the years following its liberation 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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